주역 - 이론

주역이론 1) 주역(周易)은 언제 완성되었나?

이칭맨 2017. 9. 8. 12:31



주역이 만들어진 기본 배경들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동영상입니다.

본 글은 동영상 강의 소개 위주이므로 자세한 내용은 동영상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 주역의 시작과 완성 시기


주역(周易)은 주(周)나라의 역(易)입니다. 그 이전에 상(商)나라에도 귀장역(歸藏易)이란 역(易)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역(周易)은 상(商)나라가 멸망하고 주(周)나라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철학체계와 귀장역(歸藏易)을 바탕으로 이론을 수정해서 주(周)나라에 맞는 체계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서주(西周) 초기부터 이러한 주(周)나라의 철학에 맞는 역(易)의 기본 원칙이 정해지는데, 그러한 작업에는 주(周)나라의 문왕(文王)과 그의 아들이자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의 역할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주역(周易)의 모습이 주나라 초기에 이미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 전해지는 통행본 주역 판본은 동주(東周) 초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동주(東周)란 주(周)나라의 마지막 왕인 유왕(幽王)이 반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뒤, 그의 아들 평왕(平王)이 왕위에 오르면서 도읍을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이전한 시기부터 시작됩니다. 이전의 려왕(厲王)에 이어 두 번이나 주(周)나라의 왕들이 왕위에서 쫓겨나는 일이 생기게 되니 왕권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지고, 주변의 제후들도 더 이상 예전처럼 왕을 따르지 않고 각자의 패권을 주장하는 춘추시대가 이때부터 펼쳐지게 됩니다. 

제가 현재 전해지는 통행본 주역(周易)의 판본이 동주(東周) 초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주역의 이야기인 효사(爻辭)에 반영된 역사적 배경이 동주(東周) 초기의 일까지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모든 근거를 다 이 동영상에서 제시하기엔 부족하지만 차차 강의가 진행되어 가면서 근거들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는 주역(周易)이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주역(周易)은 서주(西周) 초기에 이론이 정해지고 그에 맞게 주역(周易)의 이야기인 효사(爻辭)를 써 내려갔는데, 그 효사의 내용들이 후대로 내려가면서 계속 변화, 수정되어 가다가, 주(周)나라의 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동주(東周) 초기에 그 진행이 멈추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2) 주역(周易)은 역사의 기록


주역(周易)의 이야기를 효사(爻辭)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효사의 내용은 대부분 실제 주(周)나라의 역사를 암호와 같은 상징적인 문장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고대 왕실에는 사무(史巫)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의 관직이 아니라 사관(史官)과 무관(巫官)을 합쳐서 하나로 사무(史巫)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러한 사무(史巫)라는 단어는 주역(周易)의 중풍손(重風巽)괘에서도 나옵니다. 그만큼 사관(史官)과 무관(巫官)의 일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관(史官)은 기록을 담당하는 관직이었는데, 왕실의 기록이 쌓이면 그것이 곧 그 왕조의 역사가 되므로 사관은 과거의 역사와 관련된 일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관(巫官)은 제정일치 사회의 왕실에서 신(神)과 연락하고 미래의 일을 물어서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참고가 되도록 했으니, 이는 미래와 관련된 일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 하남성 문자박물관에 전시된 상왕문복(商王問卜) 모형>


이렇게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합쳐서 과거의 일을 참조하여 미래의 일을 결정하도록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주역(周易)의 효사(爻辭)에 목적 중 하나입니다. 단지 그 효사의 내용이 암호처럼 알기 어렵게 쓰여서 그렇지, 주역의 효사는 거의 대부분이 실제 역사 이야기들입니다. 단, 그것을 단지 역사적 참고 자료로만 쓰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미래의 일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게 되는지는 앞으로 주역을 공부해 가면서 하나하나 알아갈 것이고, 여기서 다 설명하기에는 무리입니다.

3) 숫자괘


고대에는 역(易)에 나타나는 음(陰)과 양(陽)의 표시를 갑골문 숫자 1~9까지 숫자로 표시했는데, 홀수는 양(陽)을 표시하고 짝수는 음(陰)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78년 중국에 장정랑(張政烺) 선생이 《고대 서법(筮法)과 문왕의 주역(周易) 전개》라는 강연을 통해서 밝혔습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전국시대로 가면서 점차로 일(一)과 육(六)으로 각각 양(陽)과 음(陰)을 대표하는 기호로 쓰이다가, 음(陰)을 나타내는 기호는 육(六)자가 중간이 끊어진 팔(八)자 모양이 됩니다. 전국시대의 자료들에서는 음(陰)을 나타내는 부호가 육(六)자 모양으로 나오고, 한대(漢代)의 마왕퇴(馬王堆) 무덤에서 발견된 백서주역(帛書周易)에서는 팔(八)자와 비슷한 모양으로 나옵니다. 결국 일(一)자가 양(陽)을 대표하는 기호(⚊)가 되고, 중간이 끊어진 팔(八)자가 오늘날의 음(陰)을 나타내는 부호(⚋)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은(殷)나라 유적인 사반마촌(四盤磨村)에서

발굴된 복골(卜骨)에 나타난 숫자괘


고대에 음(陰)과 양(陽)을 숫자로 표시했다고 해서, 고대의 역(易)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易)과 크게 다르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고대인들이 점을 치던 서법(筮法)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서법(筮法)은 6, 7, 8, 9의 네 가지 숫자만 사용하는데 고대의 발굴 자료들은 1부터 9 혹은 10까지의 숫자를 사용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앞으로 강의를 진행해 가면서 설명할 것입니다.


© 2017. 9  Joongh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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