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갑골문

간지(干支)의 의미 - Ⅲ. 동한사분력(東漢四分曆)과 간지기년(干支紀年)

이칭맨 2017. 12. 1. 17:26

1. 개력(改曆)의 이유


태초력(太初曆)과 삼통력(三統曆)에서 당시 학자들이 아직 알지 못하고 적용시키지 못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당시의 천체 상황에는 매우 근접하게 만들어졌으므로 한동안은 이 역법(曆法)이 당시의 천체 운동과 잘 맞아 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오차가 점점 커지면서 문제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후한서ㆍ율력지중(後漢書ㆍ律曆志中)》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태초원년이래 삼통력을 시행한지 100여년, 력(曆)이 실제 천체운행에 비해 점점 뒤에 오는 후천(後天)현상이 나타났다. 실제 초하루(朔)가 역법상의 예상일보다 앞서 가고, 초하루(朔)가 혹 그믐(晦)에 오거나 초하루(朔)에 달이 보이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自太初元年始用三統曆,施行百有餘年,曆稍後天,朔先曆,朔或在晦,月或朔見)』


여기서 후천(後天)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선천(先天), 후천(後天)이 아니라 역법(曆法)에 의한 날자와 실체 천체의 운동 간에 시간이 일치하지 않고 선후(先后)의 차이가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력(曆)이 후천(後天)한다는 것은 천(天)이 선력(先曆)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고로 문장 앞부분에서는 역(曆)이 후천(後天)한다고 하고, 그 뒤에선 삭(朔)이 선력(先曆)한다고 한 것입니다.(曆稍後天,朔先曆) 달의 변화상으로는 그믐(晦) 다음에 초하루(朔)가 오는데, 삭(朔)이 선력(先曆)한다고 한 것은 하늘에 삭(朔)이 지나간 뒤에야 역법상으로 삭(朔)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실제로 삭(朔)이면 역법상 날자는 그 하루 전날이 됩니다. 고로 실제 하늘의 초하루(朔)가 역법상으로 그 전날인 그믐(晦)에 오기도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날 역법상으로 삭(朔)이 되면 이미 실제 하늘에 삭(朔)은 지나가 버린 뒤가 됩니다. 이때의 역법(曆法)은 삼통력(三統曆)을 말합니다. 속도로 치면 실제 하늘의 운행이 역법(曆法)의 시간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린 것이고, 역법이 하늘에 점점 뒤쳐진 것이 되므로 역초후천(曆稍後天)이라고 한 것입니다. 만일 1년 혹은 1달의 주기에 크게 변동이 없이 이것을 바로 잡는 역법을 만들려면, 역법(曆法)의 시작점을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역법으로 역원(曆元)이 되는 몇 년 전의 갑자(甲子)일이 되는 날 삭(朔)이 오게 해야 합니다. 새로운 역법이 정확하다면 천체의 운행과 똑같아지므로 새로운 역법이 곧 천(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역법은 력(曆)이라고 하면 력(曆)을 미래를 향해 조금 앞으로 밀어야 앞서가는 천(天)에 맞출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력(曆)을 앞으로 조금 민 것이 사분력(四分曆)에서 역원(曆元)을 바꾸어 새로 정한 것에 해당이 됩니다.


2. 동지(冬至)날 해의 위치 교정


태초력(太初曆)과 삼통력(三統曆)에서는 동지(冬至)에 해의 위치가 견우(牽牛) 초도(初度)에 있다고 나옵니다. 《한서ㆍ율력지중(漢書ㆍ律曆志中)》에 가규(賈逵)가 말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태초력으로 동지에 해가 견우초(牽牛初)에 있다 했는데, 이는 견우중성(牽牛中星)이다. 고대의 황제(黃帝), 하(夏), 은(殷), 주(周), 노(魯)가 동지(冬至)에 해가 건성(建星)에 있다고 했는데 건성(建星)이 지금의 두성(斗星)이다.(太初曆冬至日在牽牛初者,牽牛中星也。古黃帝、夏、殷、周、魯冬至日在建星,建星即今斗星也)』


이는 아래 그림을 보는 것이 더 이해가 쉽습니다. 이래 그림은 앞서도 나온 바 있습니다.



여기서 28수(宿) 중 북방(北方)에 위치한 별자리들 중에 붉은 동그라미로 표시한 두(斗)와 우(牛)라고 불리는 영역인 두수(斗宿)와 우수(牛宿)가 있는데 두수(斗宿)의 대표적인 별자리는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과 닮은 여섯 개의 별로 이루어져서 남두육성(南斗六星)이라고 불리는 두성(斗星)이고, 우수(牛宿)의 대표 별자리는 견우(牽牛)입니다. 견우초(牽牛初)는 위에 그림에서 두(斗)와 우(牛) 사이에서 견우(牽牛)가 시작되는 지점을 말합니다. 앞서 《후한서ㆍ율력지중(後漢書ㆍ律曆志中)》에 가규(賈逵)가 말한 내용 중 “고대의 황제(黃帝), 하(夏), 은(殷), 주(周), 노(魯)가 동지(冬至)에는 해가 건성(建星)에 있다고 했는데 건성(建星)이 지금의 두성(斗星)이다.”라는 대목에 나오는 두성(斗星)이 바로 견우(牽牛) 옆에 별자리이고 이것이 건성(建星)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성(斗星)과 건성(建星)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두성(斗星)과 건성(建星)은 서양의 궁수자리(射手座)에 속한 다른 별들이고 동양의 28수(宿)로 보면 건성(建星)은 두수(斗宿)와 우수(牛宿) 사이에 속합니다.


앞서 《한서ㆍ율력지상(漢書ㆍ律曆志上)》에서 인용한 문장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이전 역(曆)의 상원태초(上元泰初) 4,617세에서 원봉(元封) 7년에 이르기까지 ‘알봉 섭제격(閼逢 攝提格)’의 세(歲)를 다시 얻었다. 11월 갑자일에 삭단동지가 들었는데 일월(日月)이 모두 건성(建星)에 있었고 태세(太歲)는 자(子)에 있었다. (乃以前曆上元泰初 四千六百一十七歲 至於元封七年 復得閼逢攝提格之歲. 中冬十一月 甲子朔旦冬至. 日月在建星 太歲在子)』


여기서 일월(日月)이 모두 건성(建星)에 있었다는 것은 앞서 태초력(太初曆)에서 이 날을 동지(冬至)로 본 것과 통하는 것입니다. 주역(周易)의 건(乾)괘가 백서주역에는 건(鍵)괘로 나오고, 건(乾)에는 중심에 세운 깃발의 뜻이 있다는 것은 제 주역(周易) 세 번째 강의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건(乾)이 건(建)과 통하므로 건성(建星)도 건(乾)이 지닌 깃발의 의미를 살려서 깃발을 뜻하는 기(旗)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기ㆍ천관서(史記ㆍ天官書)》에서 “건성(建星)은 기(旗)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깃발이란 원운동의 중심이라고 제 주역강의에서 설명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심이 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주 위에 있으면서 순환의 끝과 시작의 중심자리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28수의 시작은 동방(東方)의 각(角)에서 시작하지만, 생명의 시작은 수(水)에 속하는 북쪽의 두(斗)에서 시작한다고 봐야 합니다. 《사기ㆍ율서(史記ㆍ律書)》에서 “건성(建星)은 여러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다.(建星者,建諸生也)”라고 하였고, 고대에 동지(冬至)에 해가 건성(建星)에 있다는 표현을 쓴 것도 동지(冬至)를 한 해의 시작으로 본 관점과 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지(冬至)에 해당되는 정확한 자리는 한대(漢代) 이전에는 건성(建星)이라고 했고 그것이 28수(宿)에서는 두(斗)이며 《한서(漢書)》에서는 태초원년(太初元年)인 BC 104년 당시 해의 위치가 건성(建星), 견우초(牽牛初) 등의 용어들로 나옵니다. 즉, 두(斗)와 우(牛)의 중간부위로 견우(牽牛)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당시에 실제 측정한 값이 아닙니다. 본래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인해 동지점은 매년 조금씩 이동하게 됩니다. 태초력(太初曆)에서 사용한 동지에 해의 위치는 오래전 측정한 값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유흠(劉歆)이 삼통력(三統曆)을 만들 당시에 유흠(劉歆)도 동지점(冬至點)의 위치가 정확히 견우초(牽牛初)가 아니라 ‘견우전 4도 5분(牽牛前四度五分)’이란 것을 측정을 통해 알아냈다 합니다. 아래는 진구금(陳久金)의 《중국고대천문과 역법(中國古代的天文與曆法)》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서한(西漢) 태초력(太初曆) 개력(改曆)시에 대다수 천문학자들은 동지(冬至)에 태양의 위치를 다시 측정하지 않고, 이전에 사용했던 견우초도(牽牛初度)라는 값을 사용했다. 서한(西漢) 말년 유흠(劉歆)이 삼통력(三統曆)을 만들면서 동지점(冬至點)을 측정하여 “견우전 4도 5분(牽牛前四度五分) 전후”라는 것을 얻었는데, 이것이 건성(建星)의 방위에 있다. 건성(建星)은 두수(斗宿)와 우수(牛宿) 사이의 별자리이다. 두수(斗宿)와 우수(牛宿) 사이는 26도(度)이고, 견우(牽牛) 전에 4도 좀 넘는 곳이 두수(斗宿) 21도이다. 이 수치는 비교적 정확했지만, 유흠(劉歆)은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동한(東漢) 원화(元和) 개력(改曆)시에 가규(賈逵)가 동짓날 태양이 두수(斗宿) 21도라고 명확히 제시하는데, 이 결과가 유흠(劉歆)과 일치한다. 가규(賈逵)는 자신이 측정한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그 결과가 어떤 이유로 고대의 결과와 다르게 나오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나중에 AD 330년에 동진(東晉)의 우희(虞喜)가 세차현상에 의해 동짓날 해의 위치가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한다고 하였고, 송(宋)나라 대명(大明) 6년(AD 462)에 조충지(祖沖之)가 이를 반영하여 대명력(大明曆)을 만들면서 1년을 365.24281481일로 하였는데 이는 현대의 회귀년과 50여초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분력(四分曆)에서는 동지(冬至)에 해의 위치를 실측해서 그 위치를 바로 잡았으며, 그 위치는 ‘두(斗) 21.25도(度)’입니다.


앞서 삼통력(三統曆)을 시행하고 180여년이 흐른 뒤에 나타난 후천(後天) 현상은 《후한서ㆍ율력지중(後漢書ㆍ律曆志中)》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원화(至元) 2년에 이르러 태초력(太初曆)이 천체의 운행과 더 멀어지고, 해와 달의 위치를 파악하는 수도(宿度, 별의 위치를 도수로 표시한 것)에 차이가 나는 것이 점차로 많아졌다. 관찰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동지(冬至)에 해가 두(斗) 21도와 아직 견우(牽牛) 5도에 이르지 않은 지점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견우중성(牽牛中星)이 해의 운동에 3/4일 뒤쳐졌으며, 회삭현망(그믐, 초하루, 현, 보름)이 하루 차이가 나고, 별자리 위치는 5도(度) 차이가 난다고 생각했다. (至元和二年, 太初失天益遠, 日月宿度相覺浸多, 而候者皆知冬至之日日在斗二十一度, 未至牽牛五度, 而以為牽牛中星, 後天四分日之三, 晦朔弦望差天一日, 宿差五度)』


앞서 말했듯이 유흠(劉歆)이 삼통력(三統曆)을 만들면서 이미 동짓날 해의 위치가 견우초(牽牛初)가 아니라 ‘견우 전 4도 5분 전후(위에 문장에선 5도에 이르지 않은 지점으로 나옴)’라는 것을 알았지만 원인을 알지 못하여 그냥 두었고, 사분력(四分曆)에서는 이것을 수정하여 바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사분력(四分曆)에서도 아직 이러한 오차가 생기는 원인까지 알아낸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정확한 원인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늘의 운행과 역법(曆法)의 주기를 맞추기 위해 역법(曆法)을 수정해야 하는데, 현재 역법상 날자가 삼통력(三統曆) 당시에 비해 3/4일 늦는 후천(後天) 현상을 교정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삼통력(三統曆) 당시의 역원(曆元)이 무의미해 지므로 새로운 역원(曆元)을 다시 정해야 합니다.


3. 역원(曆元)을 새로 고침


사분력(四分曆)에서는 해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는 수직 막대인 표(表)라고 불리는 도구를 이용해서 그림자가 길어졌다가 짧아지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날을 측정했는데, 그 주기를 4번 돌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1,461일로 잡았습니다. 고로 1년은 1,461을 4로 나눈 365와 1/4일로 잡았으며, 이에 이름을 사분력(四分曆)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삼통력(三統曆) 이전의 고대의 력(曆)들인 고육력(古六曆)들도 모두 이러한 사분력(四分曆)이었다가 삼통력(三統曆)에 와서 81분력으로 바뀌었고, 이것이 다시 사분력(四分曆)으로 돌아온 것이므로, 한대(漢代)의 사분력(四分曆)을 후한사분력(後漢四分曆)이라고 부릅니다.


① 삭단동지(朔旦冬至) 19년


해와 달이 동시에 같은 시작지점으로 돌아오는 기간을 구해보니 해는 19번, 달은 254번을 도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삼통력(三統曆)과는 달리 역(易)의 이론은 개입시키지 않고 측정값 위주로 서술한 것이 다릅니다. 254번을 19번으로 나누면 13과 7/19이 됩니다. 해와 달이 19년에서 만나려면 해가 1년에 1바퀴씩 19년 도는 동안 달은 254 ÷ 19년의 몫인 13번씩 19년 동안 돌고 7바퀴 더 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로 태초력(太初曆)과 같이 19년 7윤법을 씁니다. 19년간 달이 254번 돌면 1달은 27.32185039일( = 6939.75 ÷ 254)이 나오고 이것은 달이 한 바퀴 도는 항성월의 숫자가 됩니다. 그런데 달이 한 바퀴 공전하는 동안 지구도 조금씩 움직여 가기 때문에 삭(朔)에서 다음 삭(朔)이 되는 주기인 삭망월은 항성월보다 조금 길게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삭망월로 볼 때 1년은 13달이 아니고 12달입니다. 고로 19년은 235개월(=12 × 19 + 7)이고 235를 19로 나누면 12와 7/19이 됩니다. 그럼 1년의 날 수인 365.25를 12와 7/19로 나누면 삭망월의 길이가 나오게 되는데, 그 값은 29와 499/940입니다.


② 야반삭단동지(夜半朔旦冬至) 76년


사분력(四分曆)에서는 동지(冬至)와 삭일(朔日)이 야반(夜半)에 오는 야반삭단동지(夜半朔旦冬至)주기를 부(蔀)라는 용어로 부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삭단동지(朔旦冬至)의 주기인 19년을 기본으로 4를 곱해주면 됩니다. 앞서 1년의 주기를 구할 때 삼통력(三統曆)은 하루를 81등분했기 때문에 81을 곱했지만, 사분력(四分曆)은 하루를 4등분 했으므로 4를 곱한 것입니다. 고로 1부(蔀)는 19 × 4 = 76년이 됩니다.


③ 갑자야반삭단동지(甲子夜半朔旦冬至) 4560년


이번에는 야반삭단동지(夜半朔旦冬至)가 갑자(甲子)일에 만나는 갑자야반삭단동지(甲子夜半朔旦冬至)의 주기를 구해야 하는데, 사분력(四分曆)에서는 초진법(超辰法)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단순히 육십갑자의 주기인 60을 1부(蔀)에 곱한 4,560년이 갑자야반삭단동지(甲子夜半朔旦冬至)의 주기인 1원(元)이 됩니다.


④ 3/4일 이동


그러면 이제 역원(曆元)을 다시 구해야 합니다. 당시의 생각으로 동지점(冬至點)에 어긋난 날자를 맞추기 위해서는 력(曆)상에 3/4일을 앞으로 이동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그 날의 동지(冬至)는 야반(夜半)의 시각에 오는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나왔듯이 일단 삭단동지(朔旦冬至)가 겹치는 날들만 보면 이는 19년 주기입니다. 이것이 야반(夜半)에 오는 것은 여기에 4를 곱한 76년이 됩니다. 즉 76년이면 비록 60갑자상의 날은 다르지만 하루만큼의 시간차를 두고 삭단동지(朔旦冬至)가 야반(夜半)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60을 곱하면 같은 날 야반(夜半)에 삭단동지(朔旦冬至)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76년의 3/4인 57년만큼의 시간차이를 둔다면 삭단동지(朔旦冬至)가 3/4일만큼 차이가 나게 됩니다. 즉 57년 전에서 시작해서 19년 가면 1/4일 앞으로 가 있게 되고, 19 × 3인 57년 뒤에는 3/4일 앞으로 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BC 104년에서 뒤로 57년 전인 BC 161년 경진년(庚辰年)을 갑자야반삭단동지(甲子夜半朔旦冬至)의 새로운 역원(曆元)으로 삼고, 이것을 중기지원(仲紀之元)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때의 경진년(庚辰年)은 BC 104년을 정축년(丁丑年)으로 보고 초진(超辰)현상 없이 60갑자를 그대로 밟아가서 나온 간지(干支)입니다.


4. 두 종류의 역원(曆元)


사분력(四分曆)에서는 이 외에 몇 개의 역원(曆元)을 더 제시합니다. 이에 대해 《후한서ㆍ율력지중(後漢書ㆍ律曆志中)》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사분력 중기지원(仲紀之元)은 효문황제(孝文皇帝) 후원3년(後元三年, BC 161년), 세(歲)는 경진(庚辰)에 있었다. 위로 45년 전(BC 206년)에는 세(歲)가 을미(乙未)에 있는데, 이때가 한흥원년(漢興元年, 한나라가 시작된 해)이다. 또 그 위로 275년 올라가면(BC 481년) 세(歲)가 경신(庚申)에 있는데 공자(孔子)가 기린(麒麟)을 얻은 해이다. 2,760,000년을 더 올라가면 다시 경신년(庚申年)을 얻는다. (四分曆仲紀之元, 起於孝文皇帝後元三年, 歲在庚辰. 上四十五歲, 歲在乙未, 則漢興元年也. 又上二百七十五歲, 歲在庚申, 則孔子獲麟. 二百七十六萬歲, 尋之上行, 復得庚申)』


《좌전(左傳)》 노애공 14년(魯哀公十四年)에는 숙손씨(叔孫氏)의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냥에서 괴이한 짐승을 잡아 죽였는데, 공자(孔子)가 이것을 보고 기린(麒麟)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孔子)는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麒麟)이 죽은 것을 보고, 그가 집필하던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그만 쓰기로 결심했다 합니다. 이것이 위에 인용문에 나온 공자획린(孔子獲麟) 이야기입니다. 이로써 사분력(四分曆)에서는 성스러운 동물인 기린(麒麟)의 죽음과 하나의 역사책이 끝을 맺는 상징적인 사건을 역원(曆元)의 추정 과정에 개입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분력(四分曆) 중기지원(仲紀之元)인 효문황제(孝文皇帝) 후원3년(後元三年, BC 161년)에서 경신상원(庚申上元)까지는 2,760,320년인데 이것을 갑자야반삭단동지의 주기인 4560으로 나누면 605와 1520/4560이 됩니다. 후원3년(後元三年, BC 161년)은 경진년(庚辰年)이고, 상원(上元)은 경신년(庚申年)이므로 4560으로 나누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분력(四分曆)에서는 갑자야반삭단동지의 주기를 다시 1/3씩 나눠서 각각 제 1기(紀), 제 2기(紀)와 같은 단위로 부릅니다. 그리고 1520은 4560의 1/3이므로 1520/4560은 1기(紀)가 됩니다. 고로 605와 1520/4560은 605원(元)에 1기(紀)를 더한 것이고, 이는 606원(元)의 2기(紀)가 시작되는 지점과 같습니다.1 기(紀)가 본래 원(元)을 3등분한 것이므로 2기(紀)는 중기(仲紀)가 되고, 이런 이유로 BC 161년을 중기지원(仲紀之元)이라 부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분력(四分曆)은 크게 두 개의 역원(曆元)이 있는데 하나는 경진년(庚辰年)이고 다른 하나는 경신년(庚申年)입니다. 경진년(庚辰年)은 순전히 천체의 운행을 중심으로 만든 것입니다. 한편 경신년(庚申年)은 공자획린(孔子獲麟)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일정 주기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얻은 역원(曆元)입니다. 천체의 운행을 위주로 한 역원(曆元)과 역사적 사건을 위주로 한 역원(曆元)은 원(元)을 3등분한 기(紀)라는 단위에서 역법상으로 연관성을 가지게 됩니다.


5. 세성(歲星) 초진법 폐기


사분력(四分曆)에서 초진법(超辰法)을 쓰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세성(歲星)의 운행을 중심으로 해의 운행을 맞추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세성(歲星)의 운행에 세(歲)를 맞추기 위해 초진법을 쓰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사실 해를 기록하는데 세성(歲星)이 해보다 우선권을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별자리로 점을 치는 점성술(占星術)이 아니라면 세성(歲星)의 역할은 해의 운행 주기를 알려주는 지표의 역할일 뿐입니다. 처음에 해를 기록하는데 세성(歲星)을 사용한 것은 그 운행주기가 12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12년보다 조금 짧아서 시간이 지나면 오차가 생긴다면 구지 세성(歲星)을 기준으로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간지(干支)를 이용해서 해를 표시하는 기준점을 잡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은 있습니다. 황도는 해가 1년 동안 지나가는 길이므로 이것을 12등분하면 월(月)을 구분하기엔 용이하지만, 세성(世誠)처럼 12년 비슷한 주기로 돌아가는 지표가 없으면 올해가 전체적으로 12차(次) 중 어디에 해당되는지 판단할 근거가 없어집니다. 사분력(四分曆)에서 세성(歲星)과 초진(超辰)을 고려하지 않게 된 것에 대한 설명은 《후한서ㆍ율력지중(後漢書ㆍ律曆志中)》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세(歲)가 초(超)하는 것을 살펴보면, 천원(天元) 11월의 갑자삭단동지(甲子朔旦冬至)에 해와 달이 모두 새로 시작된다. 해는 하루에 1도(度)를 가고, 365와 1/4을 가면 한 바퀴 돌아오는데, 이것을 세(歲)라고 부른다. 세(歲)가 일진(一辰)씩 따라 움직이면 해는 공주천(空周天)하지 않으니 세(歲)가 초진(超辰)할 이유가 없다. (案歲所超,於天元十一月甲子朔旦冬至,日月俱超。日行一度,積三百六十五度四分度一而周天一匝,名曰歲。歲從一辰,日不得空周天,則歲無由超辰)』


윗글에서 도(度)는 360도를 기준으로 1도씩 나눈 각도가 아니라, 365와 1/4을 한 바퀴 도는 기준으로 나눈 도(度)를 말합니다. 세(歲)의 정의를 해가 365와 1/4도(度)를 돌고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으니 여기서 말하는 세(歲)는 세성의 주기가 아닌 해의 주기를 위주로 보는 것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가 공주천(空周天)한다는 것은 삼통력(三統曆)에서 세성(歲星)의 공전주기가 12년보다 더 빨라서 세성(歲星)의 속도에 맞춰주기 위해 144년에 1번씩 해의 간지(干支)를 하나씩 건너뛰고 다음으로 가게 하는 것을 말하고, 이것을 세(歲)가 초일진(超一辰)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분력(四分曆)에서는 세(歲)의 주기를 더 이상 세성(歲星)의 주기에 맞출 필요가 없고, 1년에 한 바퀴 도는 해의 움직임에 맞추게 됩니다. 그래서 “세(歲)가 일진씩 쫓아간다.(歲從一辰)”라고 한 것에서 일진(一辰)은 해가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를 365와 1/4도(度)로 보고 12등분한 하나의 영역을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세성(歲星)의 공전주기가 11.86년인 것에 의한 초진(超辰)의 문제는 없어지게 됩니다.


6. 간지기년(干支紀年)의 기준점


그런데 남은 문제는 어디를 기준으로 해서 갑자년(甲子年) 혹은 병자년(丙子年)을 정할 것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앞서 세성(歲星)을 기준으로 참고할 때에는 세성(歲星)의 위치가 그 근거가 될 수 있었지만 세성(歲星)을 고려하지 않게 되면서는 그 기준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분력(四分曆)을 보면 이전에 삼통력(三統曆)에서 정한 간지(干支)를 그대로 이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별다른 설명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고로 사분력(四分曆)에서 간지기년(干支紀年)에 사용되는 간지(干支)의 순서는 문서에 나오는 내용 외에 추론을 통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에 대한 추론은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각각의 해에 간지(干支)를 붙이는 것은 단지 60이라는 주기를 기억하기 편하게 하기 위한 용도일 뿐, 더 이상 그 안에 어떠한 의미가 담긴 기원을 찾기 어렵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간지(干支)의 본래 의미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간지(干支)를 기년법(紀年法)에 결합하는 것에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존에 사용하던 방법을 단지 편의상 계속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비록 삼통력(三統曆)과 그 역원(曆元)이 의미를 잃어버렸지만, 각각의 해에 간지(干支), 특히 십이지(十二支)를 붙이는 방법에는 아직 유용성이 남아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비록 날자나 시간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는 3/4일 같은 작은 오차로 인해 중대한 차이가 생기지만, 1년 단위의 큰 흐름에는 삼통력(三統曆)의 오차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태초원년(太初元年) 당시에 세성(歲星)이 곤돈(困敦)에 있었던 것은 역원(曆元)과 상관없이 직접 관측해서 얻은 사실이고, 이를 통해서 태세(太歲)가 자(子)에 있다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분력(四分曆)이 비록 세성(歲星)을 직접 응용하지는 않지만, 12년을 주기로 하는 순환에서 해가 어느 위치에 해당하는 가는 세성(歲星)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이전에 사용하던 역법(曆法)과의 연속성도 유지할 수 있어서 편하고, 그 외에 딱히 다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세성(歲星)의 공전주기가 12년이 아닌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세성(歲星)이 12차(次)초진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지점은 세성(歲星)과 해가 다시 동시에 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므로, 이때를 기준으로 하면 초진법(超辰法)을 사용하다가 쓰지 않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BC 105년 당시가 과연 그러한 초진(超辰)이 12차(次) 돌고 다시 자(子)로 돌아온 시기인지를 어떻게 판단 할 수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이 시점을 기준으로 세성과 해가 다시 같은 점에서 출발한다는 다른 근거가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것은 태초원년(太初元年)에 "일월여합벽, 오성여연주(日月如合璧, 五星如連珠)"라는 특이한 천문현상이 일어났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7. 일월여합벽, 오성여연주(日月如合璧,五星如連珠)


<이미지출처 : pixabay.com>


아래는 《한서ㆍ율력지상(後漢書ㆍ律曆志上)》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에 등평(鄧平)이 만든 81분율력으로 바꿔 사용하도록 조서를 내리고, 매우 부정확한 17가(家)의 법칙을 폐기하도록 하였으며, 다시 한 번 율력(律曆)의 혼명(昏明, 어둠과 밝음) 시간을 교정해 보도록 하였다. 순우릉거(淳于陵渠)가 태초력(太初曆)의 회(晦), 삭(朔), 현(弦), 망(望)을 다시 검토해 보았는데 모두가 가장 정확하였다. 해와 달이 옥으로 만든 조각을 맞춰놓은 듯하고, 오성(五星)이 진주를 꿰어놓은 듯하였다.(乃詔遷用鄧平所造八十一分律曆,罷廢尤疏遠者十七家,復使校曆律昏明。宦者淳于陵渠復覆太初曆晦朔弦望,皆最密,日月如合璧,五星如連珠)』


여기서 일월합벽(日月合璧)이란 해와 달이 같은 방위에 놓인 상태를 말합니다. ‘일월합벽, 오성연주(日月如合璧,五星如連珠)’는 해와 달 그리고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성(五星)이 한 방향으로 늘어선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합벽(合璧)이란 동그란 옥(玉) 두 개를 합쳐놓은 것 같다는 뜻이고, 연주(連珠)란 진주같은 구슬을 줄에 꿰어 놓은 것 처럼 일렬로 늘어선 것을 뜻합니다. 이에 대해 안사고(顔師古. 581년 ~ 645년)가 맹강(孟康)의 말을 인용해서 주(注)하길 “태초 상원(上元) 갑자야반삭단동지에, 7요(七曜, 일월과 오성)가 두수(斗宿), 견우분도(牵牛分度)에 모였는데, 밤새도록(夜盡) 합벽연주(合璧連珠)와 같았다(谓太初上元甲子夜半朔旦冬至时,七曜皆会聚斗, 牵牛分度, 夜盡如合璧連珠也).”고 합니다. 오성여연주(五星如連珠)는 오성취(五星聚)라고도 하는데, 고대로부터 역사상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조짐으로 본 상서로운 현상으로 전해집니다.


《금본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에서는 하(夏)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때 오성착행(五星錯行)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帝癸十年,五星錯行,夜中星隕如雨). 착(錯)은 서로 섞인다는 뜻으로 오성취(五星聚)와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금본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에서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을 정벌하러 나아가던 시기에도 오성취방(五星聚房)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帝辛三十二年,五星聚于房). 이처럼 고대 왕조의 교체기에 하늘에 오성취(五星聚) 현상이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기ㆍ천관서(史記ㆍ天官書)》에서는 한(漢)나라가 건립되던 시기에 오성(五星)이 동정(東井)에 모이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고 있습니다(漢之興,五星聚於東井). 이것이 앞서 사분력(四分曆)의 역원(曆元)을 설명하면서 나온 “세(歲)가 을미(乙未)에 있었는데, 이때가 한흥원년(漢興元年)이다”라고 한 BC 206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한서ㆍ율력지상(後漢書ㆍ律曆志上)》에 나오는 “일월여합벽, 오성여연주(日月如合璧, 五星如連珠)”는 오성취(五星聚)와는 조금 다르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성취(五星聚)는 오성이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 놓이는 것이 중요하다면 오성여연주(五星如連珠)는 거리는 좀 떨어져도 다섯 행성이 해와 달과 일직선을 이루면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초력(太初曆) 시행 전 해, 갑자야반삭단동지(甲子夜半朔旦冬至)가 들었다고 하는 BC 105년의 천체 상황을 천문관측 프로그램인 STELLARIUM으로 돌려보면서 한(漢)나라의 수도인 시안을 관찰시점으로 해서 오성취(五星聚) 혹은 오성연주(五星連珠)라고 불릴 만한 상황을 찾아보았는데 일단 오성연주(五星連珠)라고 불릴만한 상황은 BC 105년 8월 말에 몇 일간 나타납니다.



위에 이미지는 BC 105년 8월 말 해질무렵의 저녁 천문상황입니다. 해는 이미 땅 아래로 거의 지고 있는 상태이지만 해와 오성(五星)이 일렬로 늘어선 것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햇빛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달의 위치도 거의 해와 겹치는 자리에 와 있습니다. 이 전날인 8월 27일의 하늘은 아래 이미지와 같은데, 이 때는 달이 해보다 더 아래쪽에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우측 맨 아래 하얀 원이 달, 그 위에 크게 빛나는 것이 해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선명한 별자리를 보기 위해 태양광의 효과를 끄고 본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은 달이 해와 거의 같은 위치에 와 있게 됩니다.




그런데 BC 105년 당시의 음력 11월 1일(양력 11월 23일 경)을 천문 프로그램 STELLARIUM으로 검색해보면 아래 이미지와 같이  아침에 오성(五星) 및 해와 달이 거의 오성취(五星聚)라 해도 좋을 만큼 상당히 밀집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보입니다. 23일에는 달이 해보다 좀 위에 있고 24, 25일 경에는 해와 거의 비슷한 자리에 옵니다. 동지근처이므로 당연히 그 위치도 두수(斗宿)와 우수(牛宿) 사이입니다.




단, 목성과 화성, 금성이 태양보다 아래에 위치하고 있고, 이미 해가 뜬 9시 이후에야 지상위로 금성까지 올라오므로 사실상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위에 이미지는 태양광 효과를 끄고 본 것이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육안으로 관찰이 힘든 장면입니다. 실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해질무렵에 지는 해를 따라 보이는 행성들의 위치를 추적해서 판단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오성취(五星聚)도 오성(五星)이 모두 해보다 위에 있어서 관찰 가능한 상황을 말하며, 위와 같은 상황은 이상적인 오성취(五星聚)에 비해 자주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아주 오래전 일이라 오차가 있어서 그렇지 실제로 금성과 화성도 더 올라간 위치였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정말 의미있는 광경이었겠지만, 확인이 불가하므로 일단은 오성취(五星聚)보다는 오성연주(五星連珠)의 관점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구에서 볼 때 오성(五星)이 일렬로 나열한 모양이라고 해서 실제로 해를 중심으로 지구와 오성(五星)이 같은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로 이것은 과학적인 의미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일월여합벽, 오성여연주(日月如合璧, 五星如連珠)"는 구체적인 과학적 계산보다는 하나의 상징적인 이미지로서의 의미가 크고, 년(年)단위의 비교적 장기간에 걸친 구분이기 때문에 비록 날자 차이가 좀 나더라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꽤 오랜 시간 전의 상황이라 어느 정도 오차도 있을 것입니다.


오성(五星)이 매우 근 거리에 모이는 오성취(五星聚)에 비해 오성연주(五星連珠)는 좀 더 자주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해와 달이 겹치는 일월합벽(日月合璧)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좀 더 드물긴 할 것입니다. 이 이후에도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오성연주(五星連珠)와 같은 상황이  또 있었을 텐데, 과연 그 때마다 모두 여기서부터 세성(歲星)이 다시 출발한다고 봐도 태초원년(太初元年)과 이어지는 값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즉, 오성연주와 세성의 주기는 별개의 사항으로 봐야 할 것이고, 오성연주가 BC 105년을 기점으로 세성이 12차 초진을 마치고 새로 시작한다는 과학적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태초력의 간지(干支)를 계속 이어서 쓴 것은 지상에 볼 때 오성이 일렬로 늘어선 상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계속해서 취하면서, 그때의 태세의 위치도 자(子)였던 것이므로 기존의 방식을 계속 이어간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마침 십이지의 시작인 자(子)라는 시작의 의미와 겹치기도 한 것입니다. 아래는 2016년 1월에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볼 수 있었던 오성연주(五星連珠) 장면입니다.



이것도 오성(五星)들 간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오성취(五星聚)라기보다는 오성연주(五星連珠)에 가까운 장면입니다. 보통 이러한 천문현상이 일어나면 정치적으로 큰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2016년 한해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 벌어진 해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의미를 떠나서 2016년이 병신년(丙申年)이었는데, 오성연주(五星連珠) 현상이 보였으니 처음부터 간지기년을 다시 해야 되는가 하는 질문에는 사실 정해진 답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요즘 세상에 그게 큰 의미를 지니진 못하니 구지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간지(干支)로 년(年)을 기록하는데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가는 과학적인 의미는 별로 없고, 상징적인 의미가 가장 큰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처음 가정한 두 가지 추론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8. 결론


앞서 삼통력(三統曆)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소개한 내용이 사분력(四分曆)의 전부는 아닙니다. 여기서는 역원(曆元)과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분력(四分曆)으로 개력을 하면서 역원(曆元)이 바뀌고 초진법을 폐기하는데도, 기년(紀年)에 사용되는 간지(干支)는 여전히 삼통력(三統曆)을 이어간 이유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추론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본다고 해서 태초원년(太初元年)을 기점으로 세성(歲星)이 새롭게 출발하기 때문에 초진을 무시하고 시작해도 유효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완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이지(十二地)로만 보면 그 상징적인 의미만 취한다면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천간(天干)을 볼 때에는 왜 이때가 병(丙) 혹은 정(丁)에 해당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줄 자료가 부족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방식으로 역원(曆元)을 정한 것을 완전히 근거가 없다고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고대 동양인들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하나로 합친 개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비단 동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독일의 라이프니츠(Leibniz, Gottfried Wilhelm)도 이진법을 만들때 0과 1만을 사용하면서 신(神)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의 논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본래 서양도 철학과 과학이 하나로 나가다가 분리가 된 것입니다. 물론 그러면서 과학이 더 빠르게 발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과학 자체 내의 검증과정에서 취해야 할 입장이고, 영감을 얻고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에서는 다른 분야의 지식에서 영감을 얻고 교류할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철학 또한 과학적 지식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원(曆元)을 정하면서 순전히 천체의 운행만 고려하지 않고 역사적인 사건을 함께 고려한 것이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역원을 서로 분리해 놓았기 때문이죠. 물론 자연현상을 무시한 채 이론에만 집착한다거나 잘못된 이론에 근거해서 자연현상을 무시한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이비 종교들이 이러한 잘못된 이론의 적용을 수단으로 해서 사람들을 홀리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양쪽의 적절한 조화와 견제입니다. 고대인들이 천체의 운행을 알고자 한 이유는 기후와 천체현상의 규칙을 이해해서 농업과 정치행사에 활용하려고 한 것도 있고, 하늘의 현상을 통해 인간의 일을 점(占)치려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인간이 천문을 연구한 목적은 크게 과학과 인문에 다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 또한 하늘의 천체 운행 못지 않게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이 사분력(四分曆)에서 천체 운행과 역사적 사건에 따르는 두 개의 역원(曆元)이 만들어진 배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일을 점치는 일이 비과학적이고 미신이라고 해서 그들이 천체 현상을 탐구하는 것을 미신에 입각해서 탐구한 것은 아닙니다. 별자리를 점성술에 응용했지만 그러기 위해 정확한 별자리를 측정하고 변화를 살피면서 천문 법칙을 알아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와 달과 행성들의 위치를 판단하는 지표로 삼은 것은 당시의 과학적인 측정을 통해 나온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일식(日蝕)이 일어나면 신하가 왕을 시해하려는 징조라는 미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식(日蝕)이 인간이 감히 거역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신의 뜻이라고만 여긴 것이 아니라, 천체의 운행 규칙을 통해 일식이나 월식을 예측하는 당시의 과학적 계산법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앞서 나온 유흠(劉歆)이 상수학(象數學)을 적용한 것과 같은 부분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실측 자료를 바탕으로 해석한 것이고, 실측 자료도 없이 이론만 펼쳐진 것들은 틀린 것이 밝혀지면 결국엔 폐기되었습니다. 사실 순수하게 과학적으로만 볼때 어떤 해가 갑자(甲子)년이건 병인(丙寅)년이건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고대 동양의 입장에서 하나의 큰 주기를 고려한다면이야 6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는 있겠지만, 실제 천지가 개벽한 시점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이 갑자(甲子)인지 병인(丙寅)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연과학적 접근을 떠나서 자연의 변화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취하고자 한다면,  “일월여합벽, 오성여연주(日月如合璧, 五星如連珠)”와 같은 현상을 하나의 상징적인 기준점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제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는 하나의 단위와 같은 개념에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행(五行)과 역(易)도 나오는데 결국 이들도 하나의 단위 입니다. 단 앞서 말한 동양철학의 융합적 특성상 그러한 단위에도 자연과학적인 의미와 철학적인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서양에서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에 cm, m, km 등의 확장되는 단위가 있듯이 오행(五行)이나 십이지(十二支)도 절대적으로 측정되는 단위가 아니라 짧게는 하루, 길게는 1년, 더 길게는 60년을 구분하고 나누는 단위입니다. 그리고 그 구분이 꼭 10이나 12이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10이나 12이 외에도 16, 64 등으로 더 세세하게 나누어 보기도 합니다. 5와 6, 10과 12는 고대인들이 이러한 단위를 구분하면서 중요하게 여긴 철학적 개념들과 통하는 중심 단위들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의 단위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결국 1분은 60초, 1시간은 60분, 하루 24시간으로 구분되니 10과 12 그리고 그 공배수인 60의 단위에 무언가 편리함이 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인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단위가 길어지면서 한달이 가고 1년이 가면 점점 차이가 벌어져서 1달은 30일이 안되고 1년은 360일이 넘어버립니다.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는 한 달은 음(陰)이고, 해의 운행을 기준으로 하는 1년은 양(陽)이라면 음(陰)은 대체로 부족하고 양(陽)은 대체로 많아서 넘치게 됩니다. 이것을 자르고 붙여서 평균을 맞추는 것이 음양(陰陽)을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오행(五行)과 역(易)을 무시하는 이유는 그 이론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을 매우 깊게 공부를 해서 오히려 더 동양철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되는 분들도 많습니다. 본래 동양철학의 근본 개념들은 고대 왕실에서 관리하면서 그 근본 원리는 쉽게 알려지지 못하게 하였고 그 저작은 홍범(洪範)이나 주역(周易)처럼 암호와 같은 문장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다 주(周)나라가 쇠하고 춘추전국시대가 되서 제자백가들이 일어나면서 학문이 널리 퍼지게 되지만, 본래 고대 왕실에서 관리해 온 역(易)이나 오행(五行)의 이론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게 되고, 이를 해석하는 후대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본래 원작의 의도와 어긋나는 해석들이 나오기도 하고, 오행(五行)이나 역(易)을 이용하지만 다른 이론이 은근 슬쩍 개입된 새로운 이론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유흠(劉歆)이 시도한 방식처럼 무리한 확장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신비주의를 보호하는 가림막으로 일부에서는 권위를 내세우게 되기도 하고, 그것이 유교사회와 맞물리면서 정치적으로 충성과 효심 같은 권위와 복종만을 강조하는 식으로 변질된 면도 있습니다만 이것이 동양철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 논리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고 적절하게 응용한다면 오늘날 그 단위를 사용하고 안 하고는 옳고 그름의 결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단위와 수단으로써의 채용에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란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기본적인 논리구조이기 때문에 사실 맞다 틀리다는 논하는 것 조차 무의미할 정도 입니다. 대체로 옳고 그름의 논란이 생기는 경우는 오행(五行)과 역(易)에 다른 이론이 슬쩍 개입한 경우들이거나 오행(五行)과 역(易)을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나오는 해석의 차이입니다. 제가 제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 한대(漢代) 이후에 오행(五行)과 역(易)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가 아니라 그 이전에 본래 오행(五行)과 역(易)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입니다.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비판도 제대로 할 수 있고,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할 지도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2017. 11  Joongh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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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中國古代曆法. 張培瑜等著. 中國科學技術出版社 305p. 2008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