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영화에 관한 스포가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신장 ‘버닝(Burning)’은 유통회사 알바생인 남주인공 종수(유아인 분)가 우연히 어릴 적 같은 동네 살았던 여주인공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을 갔다가 벤(스티븐 연 분)이라는 남성과 함께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Buring Barn)’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1. 버닝 vs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버닝(Burning)’은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서 작가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징과 은유적 표현을 간과하면 영화가 다소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감독도 이 영화가 그런 것이란 암시를 영화 중간에 던지고 있습니다. 벤(스티븐 연 분)이 자신의 집에서 여주인공 해미(전종서 분)에게 메타포(은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죠. 그런데 이 장면 외에도 이 영화를 해석할 때 그러한 은유적 표현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는 대목이 또 하나 나오는데요. 그건 바로 주인공 종수(유아인 분)가 해미를 찾으러 다니다가 해미와 같은 나레이터 모델을 하는 여성과 나누는 대화중에 나옵니다. 그 말은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것인데요. 이는 분명 코엔 형제의 영화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나온 말이죠. 물론 대화의 흐름상으로는 “화장을 하면 했다고 뭐라 하고, 안하면 안했다고 뭐라 한다”는 등의 여성에 대한 편견을 호소하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러면서 굳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연상시키는 대목을 추가한 것은 이 영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은 메타포(은유적 표현)에 중점을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물론 전적으로 우연히 제가 느끼게 된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혼돈스러운 와중에 나도 모르게 계속 머릿속에 남았던 대사는 바로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대사였고, 마침내 이 영화에 대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은 식의 해석을 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지게 된 많은 의문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2. 망각과 기억의 조작에 관한 메타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안톤 시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를 해석할 때, 그 주요 등장인물인 안톤 시거가 바로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봐야 전체적인 맥락이 이해가 가능합니다. (물론 각자 다른 해석이 있을 수도 있죠.) 그런데 영화 ‘버닝’도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이나 현상을 그러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로 형상화한 것이란 것을 알고 보면 비로소 영화에서 이해가 안 가던 많은 부분들이 이해가 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화 ‘버닝’에서 벤(스티븐 연)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엔 그것은 바로 ‘망각’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억 속에서 사소한 기억들은 잊어버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조작되기도 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 시거가 ‘죽음’을 상징했듯이, 버닝에서 벤은 ‘망각’을 상징합니다. 사실 죽음과 망각은 공통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망각이란 곧 기억의 죽음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실제로 영화 ‘버닝’에서도 그러한 진실된 기억의 망각을 해미의 사라짐 혹은 죽음이라는 것으로 상징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동양적인 윤회관을 덧붙이면 죽음이란 곧 새로운 탄생이기도 합니다. 여러 개의 복잡한 단편적 사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하나의 큰 사건에서 망각되어 버린 하나의 단편적 사건이 있으면, 그 빈자리를 또 다른 새로운 조작된 기억이 자리 잡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의 똑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선악(善惡)이 달라지게 됩니다. 가령 영화에서 종수 아버지가 분노조절장애가 있어서 그것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는 정보는 그 사건에 대한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종수 어머니의 세속적이고 아들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서 어쩌면 어머니의 가출은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가 원인이 아니라 어머니의 그러한 가정적이지 못한 경박한 모습이 원인이고 아버지는 그 모습에 분노를 표출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는 그 두 가지 가정 중에 무엇이 진실이라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영화의 이러한 관점을 유심히 보지 않은 경우, 여전히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가 원인이고 어머니는 피해자라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머니의 그러한 경박한 모습이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를 키웠을 수도 있는 것이죠. 진실은 덮여지고 가려진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누군가는 정신병자라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로 역사에 기록되고, 그 사람을 정신병에 이르게 한 사람의 책임은 영원히 묻혀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 제목 ‘버닝(burning)’이 태우는 것은 바로 기억을 태워서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등장인물이 망각을 상징하는 것은 영화 ‘버닝’이 바탕을 둔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도 나오는 은유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과 영화에서는 단지 망각뿐만 아니라 그러한 망각으로 인해 생긴 빈 공간을 거짓 정보로 채워 넣는 ‘기억의 조작’이라는 이미지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작가 자신이 "나는 자신의 기억을 좋을 대로 바꿔 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고, 기억의 조작을 상징하는 판토마임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영화 ‘버닝’에서는 그러한 기억의 조작에 이미지를 소설에 비해 훨씬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근거들을 하나씩 알아보도록 합시다.
3. 판토마임
"여기에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여기에 귤이 없었다는 것을 잊어라."
위에 대사는 영화 초반에 여주인공 해미가 남주인공 종수와 만나서 자신이 판토마임을 배운다고 하면서 귤을 먹는 행위를 판토마임으로 보여주고 나서 한 말입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이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는 가장 인상 깊은 대사이기도 하죠. 이 대사는 하루끼의 원작 소설에도 나옵니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믿는 것’은 현재를 바꾸는 것이고, ‘여기에 귤이 없었다는 것을 잊는 것’은 과거를 바꾸는 것입니다. 잊는다는 것은 과거를 바탕으로 하는 반응이고, 믿는 것은 현재의 반응입니다. 본래 여기에 과거에서부터 귤이 없었지만, 그러한 기억을 조작해서 본래 과거부터 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믿는 것을 뜻합니다. 이 대사는 이 영화가 단지 망각이 아니라 그러한 망각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억의 조작과 그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실제로 남주인공 종수의 망각과 기억의 조작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이러한 판토마임의 마력은 종수에게도 전염되서 종수가 홀로 자위를 하면서 마치 해미가 옆에 누워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장면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종수가 본인 옆에 해미가 있다고 믿은 게 아니라, 종수 옆에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은 종수의 판토마임인 것이죠.
본래 일반적인 경우 망각이란 기억상실처럼 어느 순간 한꺼번에 갑자기 모두 소실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가 점차로 소실되고, 간혹 필요에 의해 소실된 기억을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거짓 기억이 진짜처럼 자리 잡게 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 방송된 드라마 ‘리턴’에서도 김학범(봉태규 분)이 이와 비슷한 기억의 조작을 통해서 자신이 없었던 시간과 장소에 직원이 자신이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해서 알리바이를 만드는 내용이 나오죠.
4. 해미의 어릴 적 집 옆에 우물은 존재 했는가, 안 했는가?
이 영화에서 기억의 혼돈에 가장 중심을 이루는 소재 중 하나가 바로 해미가 어릴 적 빠진 적이 있다는 고향 집 옆에 우물입니다. 해미의 말로는 본인이 거기에 빠져서 무서워서 떨고 있을 때 종수가 와주었다고 하는데, 종수 본인은 정작 그 사실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수는 그 기억이 없다고 해서 해미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해미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죠. 아마도 본인이 사랑하게 된 해미에게 자신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고, 해미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어릴 적 기억이라서 본인이 망각하고 있었다고 스스로 착각을 하고, 그 망각의 빈 공간을 채워줄 증거들을 찾기 위해 우물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옛 추억의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그 곳에 우물이 있었냐고 묻고 다닙니다. 그 전에 해미는 어릴 적 종수가 길을 건너면서 자기에게 “너 참 못생겼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종수는 그 말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이는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니고 둘 만의 개인적인 기억이므로 종수는 그냥 그 말을 쉽게 믿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종수와 해미는 분명 어린 시절 같은 동네 살았었고, 해미의 부모님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종수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친분이 있었던 사이였지만, 사실 종수에게 남아있는 해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인 망각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종수는 해미가 말하는 해미와 자신의 함께 했던 과거의 이야기들을 그대로 믿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기억의 조작’이라는 주제에 해당됩니다. 영화가 끝날 때 까지도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릅니다. 처음 종수가 해미의 집에 방문해서 둘이 육체관계를 가질 때 해미는 종수에게 어린 시절 종수가 자신에게 “너 정말 못생겼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수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해미는 그 후 성형수술을 해서 훨씬 예뻐진 모습으로 현재 종수 앞에 서 있습니다. 성형수술을 한 얼굴은 원래의 진실이 왜곡되고 변형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종수의 반응을 보면 종수에게 해미는 아름답게 보였을 것입니다. 과연 어릴 적 못생겼던 해미가 진실일까요, 아니면 지금 아름다운 해미의 모습이 진실일까요? 아니 종수는 어릴 적 그런 말을 과연 하기는 한 것일까요? 그리고 둘이 육체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해미는 종수에게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 불가능한 상태에서 진실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인간의 갈등을 상징합니다.
5. 해미와 옷. 진실의 자리를 차지한 왜곡된 거짓의 메타포
이 영화에선 옷이 상징하는 의미가 또 중요하게 부각되는데요. 첫 번째는 종수가 어릴 적 엄마가 집을 나간 뒤 엄마의 옷을 다 태워버린 기억들입니다. 종수의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데, 어머니가 그것 때문에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갔고, 그 후로 아버지가 어머니의 옷을 다 태우라고 시켰답니다. 이 영화에서 옷은 진실을 가리고 속이는 거짓 선전물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옷을 태우라고 한 것은 어머니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물론 아버지의 입장에서 거짓이라는 뜻이겠죠. 단지 옷 뿐만 아니라 앞서 나온 성형수술 또한 그러한 진실의 왜곡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영화 후반부에서는 얼굴에 하는 화장이 그러한 의미를 반영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옷이 그러한 진실을 가린 거짓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두 번째 장면은 해미가 종수의 집에 벤과 함께 찾아가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옷을 벗어던지고 춤을 추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벌거벗은 해미의 육체는 기억이 왜곡되고 삭제되기 전의 진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덮은 옷은 진실을 가리고 왜곡하는 거짓을 상징합니다. 석양이 지는 저녁 무렵은 이제 그 진실이 모두 어둠속에 은폐되고 망각되며 사람들이 거짓된 진실을 진짜 사실로 믿어버리게 되기 직전의 시간이고, 옷을 벗어버리고 춤을 추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외치는 마지막 절규와 몸부림의 상징이 됩니다. 즉, 이 영화에서 해미는 진실과 그 진실을 가리고 덮은 거짓들이 뒤엉켜진 상태를 상징합니다.
세 번째로 나타나는 옷의 거짓이라는 상징의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종수가 벤을 살해한 뒤 자신의 옷을 다 벗어던지는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종수에게도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종수는 해미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데, 만일 해미의 말이 거짓이라면 본인이 상처받을 것이 두렵기 때문이죠. 영화의 종반부에 다다를 때 까지는 종수도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해미가 종수의 집에 벤과 함께 왔다가 떠나는 날 종수는 해미에게 왜 그렇게 창녀처럼 옷을 벗느냐고 이야기 합니다. 그 말은 진실을 상징하는 나체에 대한 종수의 거부감과 두려움을 드러낸 것이고, 그 두려움의 근원은 사실은 불신인 것입니다. 해미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고, 그것은 곧 해미에 대한 불신도 있다는 반증인 것이죠. 그래서 그 말을 하고 헤어진 이후로 해미는 행방불명이 되어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상대의 불신이 확인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의 불신보다 더 큰 상처가 되고, 두 사람 사이의 교류는 더 이상 힘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해미에게 종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믿어줄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마지막 희망이 좌절된 것입니다. 어쩌면 해미의 사라짐에 책임은 벤이 아니라 종수의 불신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6.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 영화에서 존재 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모호함은 과연 어떤 기억이 실재로 존재했던 것인가라는 질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과연 우물이 존재했던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는 해미의 말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로 연결되고, 실제 그 기억이 없는 종수의 입장에서는 해미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은 양자역학이나 고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와 인식에 관한 이론들과 공통점도 있습니다. 이 영화와 원작 소설인 하루끼의 ‘헛간을 태우다’에서도 모두 그러한 주제를 암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 나는 모럴리티란 동시 존재의 균형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시 존재?"
"그러니까, 나는 이곳에 있고, 나는 그곳에 있다. 나는 도쿄에 있고, 나는 동시에 튀니스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중에서)
위에 내용은 영화 버닝에도 나온 걸로 기억합니다. 동시존재에 관한 대목은 이 영화에 등장한 고양이를 연상하게 합니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연상시키기도 하네요. 해미는 자신이 여행을 가는 동안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줄 것을 종수에게 부탁하는데, 종수는 그 좁은 해미의 집 안에서 고양이를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소리를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종수는 해미의 말을 믿고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러 해미의 빈집에 들르는데 침대 아래 고양이 대변이 있는 것을 보고 분명히 고양이가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보일(boil)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해미가 행방불명 된 뒤에 종수는 다시 벤의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거기서 벤이 얼마 전 주워 왔다는 고양이를 보게 됩니다. 잠시 문이 열린 틈을 타고 주차장으로 도망간 고양이를 찾으러 다니다가 고양이를 발견한 종수가 보일(boil)이라는 이름을 불러주자 고양이가 종수에게 와서 안기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는 관객들은 어쩌면 그 고양이가 본래 해미가 기르던 고양이이고, 벤이 해미를 죽인 뒤에 고양이 보일을 데려와서 키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종수의 의심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과연 그러한 의심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하나의 진실을 충분히 왜곡할 수 있을 만한 거짓일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의 판단을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의심을 가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동시에 왜곡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한쪽이 거짓이고 다른 쪽이 진실인 상황에서 하나의 증거는 누군가에겐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이 되기도 합니다. 그 증거 하나만으로는 그 사건의 본질을 모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종수에게는 이 고양이가 해미가 키우던 것이라는 것을 뒷받침 해주는 하나의 증거 혹은 실마리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의 실마리만으로 사건의 전체를 구성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실의 전체를 확신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실마리가 요구되고 그러한 여러 가지 실마리 중의 또 다른 하나로 나타나는 것이 영화 시작부에서 종수가 해미이게 준 시계와 똑같은 시계를 영화 종반부에 종수가 벤의 집 화장실에서 발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시계는 영화 중반부에 종수가 해미를 찾아다니면서 만난 나레이터 모델도 차고 있던 것과 같은 흔한 시계이기도 합니다. 즉 이 시계라는 실마리 역시 하나의 진실에 대한 이쪽과 저쪽의 의견 모두에게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와 동시에 근거로써의 부족함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에서 보일(boil)이라는 고양이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개념과는 약간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의 관점에서는 벌거벗은 해미의 육체처럼 진짜 진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진실이 전달되고, 보존되는 과정에서 잊혀지거나 빠지고 왜곡된 부분들이 생겨나면서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상황으로 되어버리는 것이죠. 양자역학이나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존재의 근본적인 인식론적 모호함과는 약간 차이가 있을 수도 있죠. 영화 ‘버닝’에서 말하는 모호함은 처음부터 불확실하던 것이 아니라 본래 확실하던 것이 점차 모호하게 변해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변화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회적 현상에서도 본래 절대적 진실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봐야할 것은 그러한 해답을 내리기 힘든 근원적인 존재론에 대한 의문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실이 점차로 망각되고 왜곡되어 가는 것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서로 대립되는 양측간의 갈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 영화 속에서도 어떠한 하나의 정치적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권력과 진짜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 간의 갈등요소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영화 중간에 주인공 종수가 보게 되는 그림에 용산참사를 표현한 그림이 나오는 것이나, 종수의 아버지가 공무원 상해죄로 재판을 받는 장면 등이 그러한 감독의 해석을 반영합니다. 이것이 영화 ‘버닝’이 하루끼의 원작소설과 다른 점이기도 하죠.
물론 하루끼의 소설이 단지 망각에 대해서만 다루고 이러한 기억의 왜곡과 조작에 대해서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겠지만 하루끼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사실은 주인공인 소설가 하루끼 본인의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나타낸 글이고, 이창동 감독도 자신의 영화 ‘버닝’이 영화를 만드는 것에 관한 이야기도 담고 있다고 했듯이 소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사건의 단편들을 모아서 이어가는 과정에 소설가 자신의 견해와 의견이 반영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설을 쓴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는, 이창동의 ‘버닝’에서는 권력자와 언론이 소설쓰기의 형식을 빌어서 사건의 실체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부정적인 과정으로까지 확장 되서 반영이 됩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긍정적이며 무엇이 부정적인지에 대한 답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 자체가 모호한 것이 아니라 이 영화가 진실의 모호함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실은 우리도 모르는 어느 좁은 틈새를 통해 아주 짧은 순간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한 진실이 드러나는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 북향인 해미의 방안에 하루 1번 아주 짧은 시간동안 남산타워의 유리에 반사된 빛이 해미의 방을 비추는 순간으로 상징 되서 나타납니다. 그 장면은 해미와 종수가 진실을 덮은 거짓을 상징하는 옷을 벗어버리고 진실만 남은 나체 상태에서 진실을 전달하는 것을 상징하는 성행위를 하는 순간 벽에 잠시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빛이 해미 방의 벽을 비추고 사라지는 것을 통해 나타납니다.
과연 고양이는 해미의 집에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이겠죠. 그것이 하루끼의 소설에 나온 “나는 이곳에 있고, 나는 그곳에 있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무도 해미의 집 안에 고양이의 존재를 직접 확인한 바 없고 진짜 진실은 덮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에서 나오는 박스 안에 고양이의 상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 그 진실이 결정되지만, 해미의 집에 고양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타임머신을 타고 해미가 고양이를 집으로 들여가는 순간을 보거나 집안에 고양이가 있는 것을 봐야 가능한 것인데,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진실은 영원히 덮어진 채로 있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종수나 관객의 입장에선 해미의 집에 고양이는 단지 확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죠. 비록 해미의 집에서 고양이 대변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해미가 몰래 깔아 두고 간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미가 사라진 후 벤이 집에 데려와서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가 바로 해미가 기르던 고양이인가라는 것도 아직까지는 영화 관객들과 종수에겐 확실한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그 진실은 오직 벤만이 알고 있겠지만, 벤은 자신이 길에서 데려온 것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종수는 고양이에게 보일이라는 이름을 불러주자 자신에게 와서 안긴 것을 바탕으로 그 고양이가 해미가 기르던 것일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것이 절대적 진실이라고 100% 확신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양이의 이름은 왜 보일(boil)일까요? 해미는 보일러실에 버려져 있던 고양이를 데려와서 키운 거라 보일(boil)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영화 제목인 버닝(burining)은 무언가를 활활 태워서 없애버리는 망각을 상징한다면, 보일은 물을 끓여서 수증기가 돼서 날아가게 하지만 그것은 물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방을 따뜻하게 하고 다시 돌고 돌며 반복해서 순환하게 되는 것이란 면에서 진실이 은은하게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해미의 방에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빛이 비치는 순간이나, 고양이가 보일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종수에게 와서 안기는 순간은 억압되었던 진실이 은근히 드러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 순간을 모두가 포착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기에 하나의 사건과 하나의 증거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논란이 일게 됩니다.
물과 불의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붉은색과 파란색의 대비로도 나타나는데, 이는 서로 대립되는 양측의 갈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물을 끓이는 보일(boil)은 이러한 물과 불이라는 대립적인 양측이 서로 뒤섞인 상태입니다. 현재로서는 이쪽일 수도 있고 저쪽일 수도 있는 것이죠. 고로 고양이는 해미의 것일 수도 있고, 벤의 것일 수도 있으며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7. 소설쓰기. 침묵하는 진실의 입을 열기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가 소설쓰기와 영화 만들기에 대한 것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볼 때 하루끼의 원작 ‘헛간을 태우다’도 주인공인 소설가 하루끼 본인의 소설쓰기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면 먼저 하루끼의 소설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떻게 은유적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작가와 작품에 따라서는 완전히 다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일부의 사건을 바탕으로 다른 이야기들을 덧붙여 가면서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즉 완전한 창작품일 경우라도 무의식중에라도 작가의 경험이 투영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실제 사건을 기술한다고 하더라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세세한 일들까지 소설에 모두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은 지워버리고 어떤 것은 남겨두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작가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본인의 의도가 개입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단편적인 사건들 사이에 생겨난 공백을 메꿔가면서 현실과 공상을 연결 짓고 그 안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반영하는 것이 하루끼가 말하는 소설쓰기라고 가정을 하고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루끼의 소설에서 그러한 기억의 망각이나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은 헛간을 태운다는 행위로 나타나고, 그러한 기억을 보존하고 채워가려는 작가의 노력은 헛간이 타지 않도록 감시하고 지키는 행위로 상징되어 나타난다고 보겠습니다. (이 해석은 영화 ‘버닝’을 보고 나서 하루끼의 소설을 후다닥 읽고 내린 결론이라 나중에 수정될 수도 있습니다.)
소설쓰기를 망각되어 가는 기억의 되살림과 보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실과 상상의 혼합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하루끼 소설의 주제가 이 영화에서는 정치적인 진실의 소설쓰기에 대한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은 주인공의 아버지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한 마디 대사도 없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 침묵의 상징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표정도 입도 굳게 닫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해미가 마지막 까지 지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몸부림으로 옷을 벗고 춤을 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표정에 남아 있는 것은 거짓에 현혹 되서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종반부에 그 분노는 아들인 종수에게서 다시 표출됩니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가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분노에 관한 영화라고 한 것이고, 이 부분도 역시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소를 키우면서 살다가 공무원에게 상해를 입혀 법정에 서게 된 것으로 나옵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종수 부친의 사건에 대해선 제 기억으론 아버지가 억울하다는 입장의 진술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판결문에서 아주 조금은 나왔던 걸로 기억하지만 거의 무시할 정도) 아버지가 상해를 입힌 것만 다루고, 아버지가 왜 공무원과 시비가 붙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진실은 자세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로 비록 영화에서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유죄로 판결이 나긴 하지만, 과연 아버지에게 억울한 일은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앞서 종수의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아버지가 억울한 상황일 수도 있다고 본 관점과 같은 상황입니다. 만일 이 영화를 보고나서 종수의 아버지는 정말로 분노조절장애 환자이고 그래서 가족조차 그를 버리고 떠났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감독이 자신의 주제를 말하기 위해 깔아 놓은 설정에 속은 것입니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죠.
8. 소, 코골이
주인공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소를 키우셨는데, 아버지가 소송에 휩싸여 구속된 뒤로는 주인공 종수가 아버지 시골집에 내려가 소를 돌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인공이 아버지 대신 소를 키운 것은 아버지의 죄를 면하기 위해 주변에 탄원서도 써서 사인을 받으러 다니는 것과 같이 아버지의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노력과 통합니다.
나중에 종수는 이 소를 팔게 되는데 그것은 종수가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노력할 것을 포기하는 상황과 통합니다. 종수는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에 아버지가 그 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정겨웠던 인물이라는 좋은 말들을 써 놓았지만, 정작 탄원서에 마지못해 사인해 주는 사람들도 솔직히 정겨웠던 사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종수가 이 소를 기르기를 포기하고 팔 곳을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것도 이제 아버지의 변호를 위한 일을 포기하는 것과 통합니다. 아마도 주인공 종수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또 다른 한 축의 인물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사건에 대한 진실은 아닙니다.
한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를 받아서 키우는 것은 아버지가 처한 상황을 종수가 이어받게 된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즉 왜곡된 진실로 인한 억울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억울함을 제대로 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소가 킁킁 거리고 음메, 음메 하는 소리는 외면되고 덮혀진 진실을 말하고자 하지만 제대로 전달되기 힘든 상황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해미가 벤과 함께 종수의 집에 와서 옷을 벗고 춤을 춘 뒤, 집 안 소파로 업혀 와서 잠에 드는데 해미가 코고는 소리가 납니다. 그 코고는 소리가 마치 앞서 나온 소가 킁킁 거리는 소리와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이 소리는 사실 아버지의 침묵과 다를 바 없는 막힌 입에서 나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과 같이 느껴집니다.
9. 비닐하우스 – 기억의 단편을 상징
이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벤을 보도록 합시다. 앞서 저는 벤이 망각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망각이란 기억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기억이란 강렬하고 새로운 것이나 기록되고 반복되는 것은 오래 남지만, 사소하고 오래된 것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망각을 상징하는 벤은 친구들과 모인자리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신변잡기들의 하찮은 이야기에 하품을 하곤 합니다. 이는 망각의 일차 공격대상이 이러한 지루하고 중요치 않은 일상의 대화들이란 의미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뇌에선 이런 지루한 일들이 가장 먼저 지워지고 중요한 일들을 위한 공간을 남겨 둡니다.
그러한 망각에는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단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흐려지고 사라질 뿐입니다. 그래서 하루끼의 소설과 영화 중간에서 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판단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죠. 비와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내린다. 강이 넘친다. 뭔가가 쓸려내려간다. 비가 무엇을 판단하겠습니까? 알겠습니까? 내가 뭐 비도덕적인 걸 지향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나는 나 나름대로 모럴리티라는 걸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힘이죠. 모럴리티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모럴리티란 동시 존재의 균형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기 하루끼 “헛간을 태우다” 중에서)
그냥 비가 내리고 강이 넘치는 자연현상처럼 망각이란 것도 그 대상의 선악(善惡)에 대한 구별 없이 진행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루끼 소설에서 헛간은 영화 버닝에선 비닐하우스로 대치돼서 나옵니다. 비닐은 유리처럼 그 안을 볼 수 있지만 오래되고 버려져 때가 탄 비닐은 흐릿한 윤곽만 비춰줄 뿐 그 안에 자세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버려진 공간 또한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버려지고 방치된 쓸모없는 것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비닐의 이미지는 영화 초반에 해미와 종수가 같이 술을 마시는 가게의 뒤쪽으로 펼쳐진 비닐 장막과 그 뒤로 모호하게 흩뿌려진 조명들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비닐 안의 공간은 그 안에 있는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또렷하게 보이고 오히려 바깥이 흐릿하게 보이는 둘 만의 진실이 만들어 지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하루끼의 원작 소설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헛간을 태우는 것은 모럴리티에 의한 행동이란 말인가요?"
"정확히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럴리티를 유지하기 위한 행위죠. 하지만 모럴리티에 대해서는 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여기서는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요."
헛간과 비닐하우스는 사람의 뇌에 저장된 단편적인 기억들을 상징합니다. 여러 개의 수많은 헛간중 하나의 헛간을 태운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단편적인 기억 중 한 개의 기억을 망각하는 것을 뜻하고, 그러한 망각은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지를 구분해서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벤에 해당되는 하루끼 소설의 등장인물은 이러한 망각이 모럴리티(morality), 즉 도덕성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라고 합니다. 선악(善惡)의 판단이 따라야 하는 도덕성과 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찾아오는 망각은 서로 상충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선(善)이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선악(善惡)의 기준이 상대적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는 주된 이유는 어떠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너무나 복잡하게 여러 가지 단편적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모여서 이루어지고, 그 중에 어떤 사건들은 망각되고 왜곡되면서 그 사건을 바라보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들이 내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누가 진짜로 어떠한 사건의 결정적인 죄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앞서 종수 아버지의 예에서 과연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가 원인인 것인지, 어머니의 성격이 더 근본적인 원인인 것인지는 모호한 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공무원과의 다툼도 마찬가지로 공무원의 불합리하고 과도한 단속이 있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분노한 사람의 책임만 묻고 그 분노에 이르게 한 사람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선(善)인가 하는 것에는 회의가 들 수밖에 없습니다. 고로 선악(善惡)은 상대적인 것이고, 만일 이러한 선악(善惡)에 절대적인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면 어쩌면 다른 누군가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악(善惡)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오리려 모럴리티(morality)에 적합한 사고방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편적인 기억들은 또 다른 사건과 어떤 형식으로건 연관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두 개의 기억이 합해져서 하나의 큰 기억을 이루기도 합니다. 가령 졸업식장에서 친구들과 사진 찍는 기억, 그리고 선생님께 작별 인사를 하는 기억이 합쳐져서 졸업식이라는 하나의 큰 기억을 만들지만, 그 졸업식 날 계단을 내려가다가 옆 반 친구와 어깨가 부딪힌 기억 등은 쉽게 잊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종수가 벤이 이 근처의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비닐하우스를 감시하기 위해 주변의 중요한 다섯 개의 헛간을 지도상에 마치 별자리처럼 선으로 이어 놓은 것은 그러한 단편적인 기억들이 서로 연관을 가지고 하나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본래 마을 근처에는 20개가 넘는 많은 비닐하우스가 존재하지만 종수가 그 중에서 특별히 다섯개의 비닐하우스에 주목한 것은 하나의 큰 기억을 완성하는 여러가지 단편적인 기억들 중에서 비교적 중요한 기억들만을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루끼의 소설에서 이러한 이미지는 소설가의 소설쓰기라는 행위에 대한 은유로 나타납니다. 즉 무수히 많은 복합적인 사건들이 뿌려진 진실의 파편들 중에서 작가는 그가 원하는 흐름에 맞는 파편들을 모으고 이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망각속으로 사라질 사건들을 보존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다루지 않는 사건들은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망각속으로 보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가 망각속으로 보내버린 그 단편적인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진실의 근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루끼에게 소설쓰기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순간은 너무나 분명하고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할 때가 아니라, 아직 그 진위와 가치를 알기 어려워서 사실과 거짓의 동시 존재 상태에 있는 그러한 기억들을 대할 때입니다. 동시에 그가 확실하다고 여긴 사건들 또한 그가 버렸던 다른 사소한 사건들에 의해 다시 진실과 거짓의 동시 존재 상태로 되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습니다.
망각을 상징하는 벤이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에 찾아간 날, 벤은 종수와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두 달에 한번 꼴로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습관이 있고, 사실은 이 주변에서 태울 비닐하우스를 답사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 이후로 종수는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날마다 주변을 뛰어다니면서 주변의 비닐하우스들을 감시합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주변에 불에 탄 비닐하우스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종수는 벤을 만나서 비닐하우스 태우는 것은 어떻게 되었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벤은 이미 태웠다고 합니다. 종수는 자기가 주변에 비닐하우스를 다 감시했는데 아무것도 불탄 것이 없었다고 했지만, 벤은 분명히 태웠고 너무 가까이 있어서 몰랐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벤이 망각을 상징하는 인물이란 것을 알아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무언가 기억에서 잊혀진다는 것은 그것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언가 기억에서 소멸되고 나면 나에게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타버렸다는 것도 알 수 가 없습니다. 그것이 타 버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것은 최소한 아직 내 기억 속엔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직 타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 벤이 태운 비닐하우스는 종수가 집중적으로 관찰한 5개의 비닐하우스 외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던 비닐하우스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앞서 졸업식이라는 기억에 대한 예처럼 계단을 내려가다가 친구와 어깨가 부딪힌 일을 망각한 것을 가지고 졸업식에 대한 기억을 망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망각과 기억의 재생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태웠다가 같은 자리에 새로운 비닐하우스를 세워 놓았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해미가 벤의 차를 타고 종수와 헤어지는 장면들은 해미가 종수에게서 멀어지고 점차 벤이 상징하는 망각의 존재로 되어가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0. 불과 물, 붉은 색과 파란 색, 망각과 소생
영화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주인공 종수는 자신이 모는 허름한 트럭을 타고 종수의 외제차를 뒤쫓아 다니는데, 이는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는 기억의 꼬리를 붙잡고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기억의 추적과 같은 행동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결국 어느 산 정상같은 곳의 못에서 차를 세워두고 서 있는 벤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뒤로 다가가서 차 뒤에 숨어서 벤을 바라보는데, 그 산정상은 인간의 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뇌 중에서도 불타버린 진실이 묻혀 있는 기억의 무덤같은 곳일 수도 있습니다.
망각이 불의 이미지로 나타난 것과 달리 물은 이미 다 타버린 뒤에 그 불을 식히는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불이 소멸이라면 그와 반대되는 물은 새로운 탄생의 이미지입니다.
불이 망각이라면 물은 새롭게 조작된 기억입니다. 불은 붉은색으로 나타나고, 물은 푸른색으로 나타납니다. 새롭게 조작된 기억이란 이미 망각된 진실을 되살려 회복하는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앞서 아버지의 소를 파는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종수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수 또한 기억의 조작에 참여하면서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결론 쪽으로 기억을 되살리고 그것을 믿으려고 하며, 자신과 반대되는 쪽으로 기억을 조작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영화에서 붉은 색과 파란 색의 대비는 기억을 지우려는 자와 지억을 지키려는 자의 대비 뿐만이 아니라, 어느 한쪽에 유리한 기억을 재생하려는 자와 그와 반대되는 쪽의 기억을 재생하려는 자의 대립구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종수가 벤이 헛간을 태울까봐 헛간을 감시하러 뛰어 다니는 장면에서 나오는 배경의 파란 색은 벤의 망각이 상징하는 붉은 색과 대비되어 나타나는데, 그렇다고 그 파란 색이 밝고 선명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안개가 낀듯 어둡고 불안한 이미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11. 화장(化粧)과 화장(火葬). 벤은 과연 해미를 죽였을까?
영화에서 말하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동시 존재의 상황을 반영한다면 벤이 과연 해미를 죽였는가는 관객이 해석하기 나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벤이 망각을 상징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벤은 해미를 죽이려고 했다고 까지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종수의 기억에 해미가 남아 있다면 해미의 전부를 죽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죽였기도 하고 안 죽였기도 한 이러한 상반되는 상황의 동시 존재는 이미 앞서 하루끼의 소설에도 나온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동시 존재를 화장(化粧)과 화장(火葬)이라는 두 가지 동음이의어를 통해서 나타냅니다. 화장(化粧)은 얼굴을 곱게 꾸미는 것이고, 화장(火葬)은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입니다. 영화 종반부에 벤은 해미가 아닌 또 다른 여인(면세점 직원)을 사귀면서 집안에서 그 여인의 얼굴에 화장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화장은 하나의 기억을 태워서 소멸시키는 화장(火葬)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기억을 조작해서 꾸며내는 화장(化粧)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서 제가 죽음과 윤회, 망각과 기억의 왜곡된 재생이라고 언급한 것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이러한 이미지가 하루끼의 원작 소설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영화 ‘버닝’에서는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하루끼 소설과 이창동 영화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 화장(化粧)에 필요한 화장품(化粧品)들은 벤의 집 화장실에 놓여 있습니다. 화장실 또한 화장터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용어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 벤의 집 화장실에서 종수는 자신이 해미에게 준 시계를 보게 되는데 그 시계가 들어있던 서랍에는 아마도 해미의 다른 물건들 혹은 다른 여자들의 것일 수도 있는 용품들이 같이 놓여 있습니다. 즉 화장실은 하나의 존재가 상징하는 하나의 기억을 지우고 그 기억의 흔적만이 납골당 안에 보관된 유품처럼 남아 있는 화장터와 연결되는 공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쩌면 해미가 사라진 뒤 벤이 새로 사귄 면세점 직원은 해미를 화장(火葬)하고 나서 새롭게 화장(化粧)시킨 같은 존재의 또다른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벤은 해미를 죽이고 다시 살려내기도 한 것이죠.
벤이 해미를 죽였는지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종수가 벤을 죽이는 장면은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하루끼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살해와 방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소설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매일 다섯 개의 헛간 앞을 뛰어 다니면서 헛간을 감시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종수가 벤을 살해하는 것은 어쩌면 앞서 종수의 판토마임 자위행위처럼, 또 다른 판토마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냐 판토마임과 같은 상상이냐가 아니라 그 상징적인 의미이죠. 망각을 상징하는 벤을 죽인다는 것은 종수가 해미를 기억 속에서 잊지 않고 영원히 간직하려는 욕망을 상징합니다. 또한 벤이 단지 기억의 소멸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의지와 상반되는 쪽으로 기억을 꾸며내는 인물을 상징한다고 보면, 벤을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에 반대되는 쪽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기도 합니다. 벤이 이렇게 기억을 조작하고 꾸며내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암시는 영화 중간에 벤이 해미와 종수를 자기집으로 데려와 요리를 하면서 하는 대사에도 나타납니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건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걸 내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서야.
그리고 더 좋은 건, 내가 그걸 먹어버린다는 거지.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이 대사에서 벤은 진실이 잊혀지도록 하는 망각과 그 빈 자리를 새로운 조작된 기억으로 채우는 것을 요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건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먹어버린다는 것은 그러한 왜곡된 진실을 통해 본인의 배를 채우고 이득을 취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잘못된 종교적 신념, 혹은 종교적이라고 부를 법한 신념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종수는 벤을 죽인 뒤 진실을 뒤덮은 거짓을 상징하는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벤과 함께 모두 태워버립니다. 하루끼의 원작 소설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인 대립구조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망각이라는 상징을 인격화한 인물과 잊혀지지 않도록 기록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소설을 만들어 간다는 소설가의 관점이 두드러지게 나올 뿐입니다. 이러한 소설쓰기라는 주제를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느 한쪽의 이익을 위해 소설을 쓰듯이 여론을 왜곡하는 이미지로 까지 확대시킨 것이 소설 ‘헛간을 태우다’와 영화 ‘버닝’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영화 버닝에서 종수와 벤이 모두 각자에게 유리한 기억의 조작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억의 실체라는 면에서 두 사람다 옳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억의 조작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자와 피해를 보는 자가 생기는 부조리한 상황까지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저항이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분노의 바탕입니다. 그래서 벤은 모든 걸 다 가진 듯한 인물로 묘사되고, 종수는 미래가 불확실하고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낡은 트럭과 외제차, 낡은 집과 화려한 저택 등등의 대비가 그러한 대립적인 입장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12. 전화기 너머의 침묵
이 영화를 보면 종수가 아버지 집에 소를 돌보러 가서 빈집에서 잠을 자는데 밤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지만 정작 전화벨 너머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장면들이 몇 번 나옵니다. 이 침묵은 앞서 언급한 아버지의 침묵을 떠올립니다. 진실은 어둠속에 거의 묻혀 가는데, 더 이상 진실을 외칠 의지가 꺾여버린 아버지의 소리 없는 외침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밤중에 울린 전화벨에선 오랜만에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에겐 아직 진실을 알아달라고 외칠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침이 과연 진실이라고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전화 통화 후에 종수가 만난 어머니의 모습은 과연 어머니의 어디까지가 진실일 것인가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러한 종수가 어머니를 만나서 한 가지 반가운 소리를 듣게 됩니다. 모두가 없었다고 하는 고향 마을에 우물을 어머니는 있었다고 말을 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종수는 우물이 없었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모두 무시하고 우물이 있었다고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종수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그가 믿고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종수 또한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기억을 왜곡하고 믿으려 하며,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주장에도 자신의 이익에 따라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대조는 하나의 사건에서 목소리를 강하게 낼 수 있는 사람과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말을 크게 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13. 분노
제가 이 영화의 주제를 망각과 기억의 왜곡이라고 보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를 본 많은 평론가나 관객들은 그러한 주제보다는 ‘분노’라는 이미지에 더 중점을 두고 보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하루끼 원작 소설에는 잘 안 보이는 영화 ‘버닝’의 가장 큰 특징이 그 ‘분노’라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창동 감독 자신도 오늘날 젊은이들의 분노를 담았다고 한 것으로 압니다. 그 분노는 종수의 아버지가 가졌던 분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는 복잡하게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 중에서 망각되고 왜곡된 부분을 각자의 이익에 따라 다르게 주장하게 됨으로써 피해를 보게 된 사람들이 표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른 지는 이차적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망각되고 왜곡되어 진실이 가려진 상황에서 절대적인 선악(善惡)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고로 일차적 문제는 설사 분노한 사람의 잘못이 명백해 보이는 상황이라고 하더라고 그 분노와 분노의 결과물만 보지 말고, 그러한 분노를 표출하게 된 전체적인 원인을 모두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14. 종수의 소설쓰기
하루끼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소설가이고 아마도 하루끼 본인일 것입니다. 영화 속 종수의 직업은 소설가 지망생으로 나옵니다. 그가 소설가 지망생이란 것을 들은 사람들은 그에게 어떠한 소설을 쓰냐고 물어보지만, 종수는 아직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종수는 확실하지 않은 가정들을 바탕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한편의 소설을 쓴 셈입니다. 우리가 흔히 뿔뿔이 흩어진 단편적인 사건들을 이어서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서 퍼트리면 “소설 쓰고 앉아있네.”라고 비꼬는 투로 말합니다. 그 흩어진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다 보면 반드시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조작된 사건들도 들어가게 되고, 전체적인 흐름이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종수가 본인이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 절대적인 진실인지는 관객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종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소설가들이 부딪히게 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고로 하루끼의 ‘헛간을 태우다’와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모호한 현실에 대한 소설쓰기와 진실에 대한 추적이라는 주제가 공통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